[국회보 2020년 4월호] 역사 속 길을 찾아_신록의 숲 흐드러진 꽃길에서 만난 역사 이야기_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슭에서 ‘무악재 하늘다리’ 건너 서대문구 안산 봉원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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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꽃사태.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기슭, 조선의 문을 연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무학대사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국사당과 선바위를 지나 산수유꽃과 개나리꽃 군락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무악재 하늘다리를 건너면 서대문구 안산이다. 절벽과 숲에서 일어난 꽃사태가 어떻게 도심으로 번지는지 보려면 안산 정상에 서야 한다. 사람 사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봉원사가 품은 역사 이야기에 오늘 하루 걸었던 길의 여운이 남는다.

꽃과 신록이 어우러진 안산 숲길

무릉도원에서 만난 이성계와 정도전, 무학대사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걷다보면 선바위와 국사당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가다보면 가파른 오르막길에 있는 일주문을 만난다. 이곳부터는 이른바 절골이다. 계단 옆 벽이 온통 벽화다. 골목에 종이 있다. 인왕사 종이다.

인왕사는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조생 스님을 만났던 곳이다. 조생선사는 호국인왕금강바라밀경을 설파하면서 조선의 번창을 기원했다. 이성계의 뜻이었다. 세종은 조선 왕조를 지키려는 뜻에서 절이 있는 산 이름을 인왕산이라고 했다.

골목 계단을 더 올라가면 국사당이다. 국사당은 태조 때부터 남산을 신격화한 목멱대왕에게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벼슬이 아무리 높은 사람도 이곳에서 제를 올릴 수 없었다. 원래는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남산에 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중요민속자료 제28호다.

산에서 날아온 산비둘기 한 무리가 국사당 마당 위 하늘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산으로 날아간다. 길가 바위틈에서 자란 산복숭아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선바위는 그곳에 있었다.

신라시대 도선국사는 선바위를 두고 왕기가 서린 길지라고 했다고 전한다. 선바위는 15천만 년 전에 생성됐다고 추정하는 바위인데, 그 생김새가 기이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 있다. 사람들은 소원바위또는 선바위라고 부른다.

선바위 뒤에서 본 풍경. 선바위가 한양도성 성곽 안에 있는 경복궁 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선바위 뒤로 올라간다. 너럭바위 위에 자란 소나무 사이로 걷다 보면 커다란 바위가 있는 시야가 트이는 곳이 나온다. 선바위와 한양도성 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남산과 서울 도심도 보인다. 옛 한양도성 사대문 안이다. 한양의 도성 경계를 정하는 과정에 있었던 일화가 전한다. 무학대사는 인왕사와 선바위를 도성의 안에 넣으려고 했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려고 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뜻을 따랐다. 선바위는 지금도 수도승의 모습을 한 채 한양도성 성곽 밖에서 경복궁 쪽을 바라보고 서있다. 선바위는 서울시 민속자료 제4호다.

 

봉수의 마지막 경유지, 안산 봉수대

안산 정상 봉수대

선바위를 보고 가던 길로 걷다 보면 산수유 전망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무악배드민턴장 방향으로 향하면 그 길에 산수유꽃과 개나리꽃 군락지가 있다. 길은 인왕정으로 이어지고, 인왕정을 지나 인왕산과 안산을 잇는 무악재 하늘다리를 건넌다. 뒤돌아본 인왕산 산비탈 위로 낮달이 떴다.

안산자락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정자를 지나면 안산자락길과 안산 정상(봉수대)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안산 정상(봉수대)으로 올라간다. 안산을 오갔던 옛사람들의 발자국이 쌓여 만들어진 오솔길을 걷는다. 연둣빛 신록이 꽃보다 아름답다. 안산 봉수대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인데, 바위 절벽에 난 길을 택했다. 절벽에 피어난 꽃과 소나무가 어울린 안산의 산세가 무악재 건너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안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봉수대와 서봉수대 두 개였다. 지금 봉수대는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 기념으로 서울시에서 복원한 것이다. 현재 봉수대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 동봉수대터다. 조선시대 전국에서 올라오는 봉수가 모이는 곳이 남산 봉수대였다. 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 중 평안도 강계, 황해도, 경기도를 거쳐 온 봉수를 남산의 제3봉수대로 이어주는 마지막 경유지가 안산의 봉수대였다. 무악산(안산) 동봉수대 터는 서울시 기념물 제13호다. 안산 봉수대에 오르면 속 시원하게 시야가 터진다. 한강 건너 멀리 보이는 관악산 줄기, 서울 도심과 남산, 북한산 줄기, 인왕산 풍경. 이 중 백미는 선 굵은 바위 절벽과 산비탈을 뒤덮은 꽃이 어울린 인왕산 풍경이다. 신록과 산벚꽃이 어울린 안산의 봄 숲과 인왕산의 꽃천지를 바라보면 봄이 만든 꽃사태가 어떻게 사람 사는 마을로 번지는지 볼 수 있다.

안산에서 본 풍경. 숲에 산벚꽃이 피었다. 멀리 남산도 보인다.

봉원사에서 만난 흥선대원군과 정도전

봉수대에서 내려와 무악정 앞 갈래길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봉원사 쪽으로 내려간다.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처음에는 지금의 연세대 교정에 절을 짓고 반야사라고 했다. 조선시대 영조 24(1748)에 찬즙, 중암 스님이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겼다. 당시 영조 임금이 봉원사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렸다고 한다. 그 현판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명부전 편액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문을 연 정도전의 글씨다. 명부전 편액이 이곳에 걸리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더불어 새 나라의 문을 열고 조선이라 했다. 정도전에 대한 이성계의 신뢰는 두터웠다. 이성계는 부인 신덕왕후가 죽자 흥천사라는 절을 지어 명복을 빌게 했다. 당시 명부전의 편액을 정도전에게 쓰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왕에 올라 계모인 신덕왕후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왕비의 제례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1669(현종 10)에 신덕왕후를 종묘에 다시 배향하게 됐고, 신흥사라는 원찰을 세웠다. 1794(정조 18)에 돈암동 흥천사로 옮길 때 명부전 건물은 봉원사로 옮겨 지으면서 천불전이라고 했다. 봉원사에 명부전 건물을 지으면서 정도전이 쓴 편액을 명부전에 걸게 되었다. 편액의 왼쪽 상단에 鄭道傳筆(정도전필)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안산 봉원사 명부전 편액.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문을 연 정도전의 글씨다

돌아가는 길, 대웅전 앞마당 한쪽에 절집 같지 않은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흥선대원군이 지내던 별장인 아소정 건물 중 한 채를 이곳에 옮겨 지은 것이다. 건물 앞 돌기둥 두 개와 건물의 보, 서까래 등 건축물 부재의 일부가 옛 아소정 건물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조선의 문을 연 이성계와 정도전의 이야기,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조선 말 역사가 해거름 봉원사 뜰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사진. 장태동(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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